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례 이사금 (문단 편집) === [[왜국]] 원정 시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유례 이사금의 재위 연간에 [[왜국]]의 신라 공격이 많아졌는데 287년에 민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 1,000여 명을 잡아서 도망갔고, 292년에 사도성, 294년에는 장봉성으로 왜군이 쳐들어왔다. 이쯤되니 유례 이사금도 왜에 대한 [[원정]]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즉위 12년(295년)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왜인들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하게 살 수 없으니 내 생각엔 백제와 더불어 일시에 바다를 건너 왜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한가?(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 이에 서불한 홍권(弘權)이 만류하였다. "우리는 수전에 익숙지 못한데 모험을 무름쓰고 바다를 건너 원정하면 예기치 못한 변을 당할까 우려되며, 하물며 백제는 거짓이 많고 항상 우리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으니 백제와 일을 도모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에 유례왕은 왜국 원정을 그만두었다.|| 물을 건너 멀리 가야 한다는 점과 한성백제가 배신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결국 포기한다. 당시 신라가 [[백제]]와 왜, 그 중에서도 [[왜구]]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훗날 [[실성 마립간]](제18대) 때도 비슷하게 [[일본]]으로의 [[예방전쟁]]을 왕이 제안했지만 그 때도 비슷하게 [[대신]]의 만류로 그만뒀다. 그런데 《삼국사기》 편찬으로부터 수백년 후 [[조선]] 시대의 [[역사서]] 《[[동사강목]]》에서 [[조선통신사]]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측 사서인 《연대기》(年代記)의 다음 기록을 인용하여 《삼국사기》에서는 하려다 말았다는 기록과 달리 신라가 실제로 왜국을 침공했다는 기록을 적었다.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의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오진 덴노|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아카시(도시)|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아카시(도시)|명석포]](明石浦)는 [[오사카|대판]](大阪)에서 겨우 100리 떨어져 있다. [[시모노세키|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롱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한다.”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應神) 12년 신해(辛亥)(AD 291년)가 바로 유례왕 8년(AD 291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동사(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 김세렴과 이경직이 참고한 일본측 사서인 《연대기》(年代記)의 기록에 따르면, 유례 이사금이 왜국 원정을 나서서 [[오사카|대판]] 근교까지 진격하고는 결국 화친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유례 이사금이 왜국 원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있어서 《연대기》(年代記)[* [[임진왜란]] 이후 제2차 조선통신사 [[오윤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갔던 이경직이 확인한 일본측의 역사서이다. 서기 1617년 [[막부]](幕府) 관리의 소개로 《일본연대기》(日本年代記)내의 기록을 보고 현장 답사까지 확인한 후에 자신의 저서인 《부상록》(扶桑錄)에 해당 기록을 인용하였다.]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신라가 침공을 시도한 시기도 295년으로 일본측에서 기록한 291년의 침공 시점과 약 4년 정도의 차이가 보인다. 물론 291년의 침공과 295년의 침공 시도를 별개로 본다면 291년에는 어떤 상황인지 몰라도 실제 침공에 성공했지만 295년의 침공 시도는 여러 문제점들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관련 기록들이 너무 부족하여 정확한 상황은 파악할 수가 없다. >일본 [[에도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진 원강 원년 신라병이 일본을 공격하매[여], 깊이 명석포에 들어왔다." >---- >- 원강(元康) 원년은 서력 291년, 신라 유례 이사금 8년, 일본 응신 22년이다. [[에도 막부]] 초기에 쓰여진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1688년(겐로쿠 원년) 에도 시대의 [[국학(일본)|국학자]] 마쓰시타 겐린(松下見林)이 쓴 역사 연구서이다. 상권 3책・중권 8책・하권 4책으로 되어 있는데 30년간에 걸쳐 [[중국]], [[한국]]의 계 126종류의 서적 중에서 일본에 관계되는 기사를 뽑아 의문 제기와 비판 등을 더하여 편찬하였다. 이 책은 당시 조선에도 반입되어 한치윤이 편찬한 《해동역사》의 권41 <통일본시말>(通日本始末)편에 내용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에도 해당 기록이 똑같이 나온다. [[파일:신라의 왜국 침공.jpg]] [[https://decentliar.tistory.com/130|지도 출처]] 만약 실제로 신라가 왜국을 침공하였다면 신라는 어떻게 일본을 공격했을까? 일단 침공 루트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첫번째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나 하관([[시모노세키]])를 거쳐 명석포를 다다르는 방법, 두 번째는 [[주고쿠]] 지방을 통해 육지를 상륙해서 명석포로 가는 방법, 세 번째는 대마도 서남부로 우회해 [[규슈]] 남부를 지나 [[시코쿠]] 지방의 남부 지역을 지나는 방법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위험한 방법이지만 신라는 3개 중 1개를 선택하여 명석포로 진격해 오사카에서 왜왕의 [[항복]]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된다.[[https://blog.naver.com/knightblack/12991548|신라 유례왕 왜국 정벌 당시 추정 지도]] 이렇듯 신라의 왜국 침공이 만약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신라는 당시 일본의 중심지인 [[나니와|나니와(難波)]] 근방의 [[아카시시|아카시노우라(明石浦)]]를 공격하기까지 했고, 이로 인해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엽전(葉田)의 위수궁(葦守宮)에서 머무름 / 어우별(御友別)의 형제 자손에게 길비국을 나누어 줌 > >경인(10일)에 다시 엽전(葉田;하다노) [葉田은 '하다'(簸娜)라고 읽는다.]의 위수궁(葦守宮;아시모리노미야)으로 가서 머물렀다. 이때 어우별이 찾아와 그의 형제 자손으로 하여금 선부(膳夫;카시하데)로서 (천황)식사를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천황은 어우별이 삼가 공손히 받드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길비국을 나눠서 그 자손 등에게 주었다. 즉 천도현(川嶋縣;카하시마노아가타)을 나눠서 큰 아들 도속별(稻速別;이나하야와케)에게 주었다. 그가 하도신(下道臣;시모츠미치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상도현(上道縣;가미츠미치노아가타)을 둘째 아들 중언(仲彥;나카츠히코)에게 주었다. 그가 상도신(上道臣;가미츠미치노오미)과 향옥신(香屋臣;카야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삼야현(三野縣;미노노아가타)을 제언(弟彥;오토히코)에게 주었다. 이가 삼야신(三野臣;미노노오미)의 시조다. 또 파구예현(波區藝縣;하쿠기노아가타)을 어우별의 동생 압별(鴨別;가모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입신(笠臣;가사노오미)의 시조다. 그리고 원현(苑縣;소노노아가타)을 그의 형 포응별(浦凝別;우라코리와케)에게 주었다. 이가 원신(苑臣;소노노오미)의 시조다. 다음으로 직부(織部;하토리베)를 형원(兄媛;에히메)에게 하사했다. 이로 인해 그 자손이 아직 길비국에 살고 있다. 이것이 그 연유이다. >---- >(웅신 22년) 291년 9월 10일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ns.d_0018_0170_0030_0020|원문]] 《[[일본서기]]》에는 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기사는 없지만 [[오진 덴노|응신(應神)]] 22년(서기 291년) 조에 갑자기 등장한 어우별[御友別] 세력에게 응신왜왕이 여섯 현을 떼어주었다는 기록이 유례 이사금 시절 신라가 일본을 침공했다는 기록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